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시프 스탈린/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문단 편집) == [[해리 S. 트루먼]]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tsdam_conference_1945-8.jpg]]|| || [[포츠담 회담]]에서 왼쪽부터 [[클레멘트 애틀리]], [[해리 S.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 || 종전을 얼마 앞둔 [[1945년]] 첫 집권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어리벙벙하고 무능력해 보였고, 그와 친했고 사적으로 존경한 루스벨트와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고까운 존재였다. 물론 트루먼은 빠르게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직위에 적응했고, 반공주의자이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트루먼은 스탈린의 [[홋카이도]] 상륙 및 반분 계획을 가차없이 거절했으며 [[리비아]]를 소련 보호령으로 할양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이는 안티들에게 [[공산당]] 첩자라고 비난받는 루스벨트의 친소 정책보다는 훨씬 강경한 것이며 이 때문에 트루먼을 방문했던 몰로토프는 트루먼의 노골적인 적대적 태도 때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트루먼의 입장에서 미소간의 대규모 첩보전이나 [[베를린 봉쇄|베를린을 둘러싼 갈등]], 동유럽 및 제3세계의 연이은 공산화 등 일련의 시대적 흐름은 '''스탈린의 소련을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여기게 했으며, 스탈린도 서방 연합군이 진주한 지역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이나 [[마셜 플랜]] 등으로 대놓고 소련을 견제하며 적성국 취급하는 트루먼의 미국을 고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미국이 전쟁 동안 보여준 압도적인 생산력과 [[핵무기]]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을, 미국은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보여준 불굴의 저항정신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기갑전력을 각기 두려워했고,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전쟁으로 국민들의 목숨을 희생했던 상황에서 또다른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미소간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편 소련군이 대일전 참전 당시 대륙에서 만주를 넘어 한반도 북부까지, 바다에서는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 최남단까지 폭풍처럼 밀고 내려온 후 한반도의 [[38선]]을 경계로 미소간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고, 급기야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냉전]]의 첫 포화를 알리게 된다. 다만 스탈린은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히틀러처럼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의 국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미국과의 세계 대전을 고려하진 않았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군이 워낙 형편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어쩔 수 없이 공군을 파견하면서도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엄청나게 신경을 썼으며, 미국 또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짓기를 원했기 때문에 소련이 참전한 것을 눈치채고도 일부러 모른 척 하는 등 서로가 조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